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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전통을 간직한 순교일번지로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 . 권상연(야고보)이 서슬퍼런 칼날 아래 참수형을 당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터며, 그 10년 후 신유박해 때 유항검 및 많은 지도자급 인물들이 순교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

그 기적의 땅에 순교한 지 100년 만에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선혈이 어린 성곽의 돌로 주춧돌을 세워 23년에 걸쳐 완공된 고색창연한 성당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쉼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은총의 요람이다.

그리고 푸른 잔디로 잘 가꾸어진 성당 뜨락과 고풍스런 건물은 마치 유럽의 한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환상적이어서, 최근에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어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성당 맞은편에 조선오백년이 담긴 경기전에는 우리 나라 유일의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전북의 상징인 풍남문과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옥마을이 어우러져 예향의 도시 전주의 맛과 멋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소리의 고장 전주답게 전통문화센터에서는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고, 한옥체험관에서는 옛선조들의 생활 체험을 직접 할 수 있으며, 전주의 명물 전주비빔밥과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반찬으로 이름난 한정식은 전라도의 맛깔스런 맛과 정에 흠뻑 취하기에 손색이 없어, 살아 있는 신앙의 숨결과 선조들의 정취를 같이 느낄 수 있다.


전동성당 설립
1889년 봄,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보두네 (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전주는 당시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 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 근교인 대성리(완주군 소양면)에 머물면서 전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성전 건축
전동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성당 건립의 공사 청부는 중국인이 맡았다.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벽돌을 직접 구워서 썼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이 어찌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있으랴!

전동성당 완공은 보두네 신부가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 바쳐 노력한 결과였다. 그 후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 것은 1931년으로, 완공하기까지 23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성당 건물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의 융합된 모습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1937년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교구로 전주 교구가 설정되고 전동성당은 주교좌 성당(1937~1957)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이 이 성당을 점령하여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및 차량 정비소와 보급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전라북도 지역 내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도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10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본당 설립 100주년(1989년)을 맞아 기념사업과 함께 성전 보수를 시작하여 1992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성당 주위에 전통문화 센터 및 한옥체험관이 들어서는 등 전통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당도 담을 헐어내고 대신 멋진 나무로 조경을 하여 어디에서나 성당 전경을 볼 수 있으며, 성당 담만 헐어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까지 헐어내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어 전주 시민들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사랑의 보금자리로, 문화의 한마당으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전통과 현대가 융합된 전통문화와 서양문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장소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터

전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전주 풍남문 밖" 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박해의 칼날 아래 참수형을 당한 최초의 순교터며, 또한 신유박해 때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과 초기 전라도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거룩한 땅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으며,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정조 때 좌상인 채제공의 신망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으며, 권상연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전라도 진산에 살고 있던 윤지충은, 1791(신해)년 5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는 숭유정책으로 유교가 국교이다시피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양반가를 유지하는 골격을 이루는 사회에서 분주폐제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왔다.
이 분주폐제(焚主廢祭 -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로 말미암아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라감사가 윤지충에게 유교 제사를 폐지한 이유를 묻자 "제사의 음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그리고 신주는 목수가 만든 목편(木片-나무조각)에 불과하니 죽은 영혼이 물질적인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사상 맨 처음 있었던 공식적인 호교론(護敎論)이었다.
그런 윤지충과 권상연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다가 1791년 12월 8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휘광이의 칼날 아래 참수되어 9일 동안 전주 풍남문에 내걸렸다. 정조 임금은 그들이 순교한 지 9일만에야 시체를 거두어 가도록 허락하였는데 12월 혹한에도 응고되지 않은 선혈로 이 때 흘린 그분들의 숭고한 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등 많은 기적과 일화를 남겼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에게는 천주교 박해 때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떨어지는 꽃망울처럼 그분들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한 신앙의 결단을, 사회적으로는 천주교라는 사교(邪敎)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항검과 동정부부 순교자상
조선 말 4대 박해 중 첫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조선인 신자 5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전라도 교회에서만 무려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4~1801)은 진주 유씨 소재공파의 8대손으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전주부 이서면 초남리에서 태어났다. 그 지방의 유명한 토호요 거부였던 그는 그 덕망과 재산으로 인해 세력이 컸다. 그는 새 종교에 대한 말을 듣고 권철신을 찾아가 천주교의 교리를 받고 실천하기 시작하여 가족과 이웃들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열심과 열성과 항구한 마음은 그를 남쪽 지방 천주교회의 모퉁잇돌이 되게 하였다.
그는 가성직제에서 사제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나, 가성직제의 부당성을 알게 되자 그 제도를 폐지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여 부단한 노력 끝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신앙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대박청래 운동 (大舶請來運動 -외국의 큰배를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관련되어 대역부도죄와 사학괴수로 1801년 9월 17일, 이 곳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참수 후 사지를 6토막을 내는 형벌)형으로 순교하였다. 조정은 유항검의 머리를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만인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또한 그의 생가를 파가저택(집을 허물고 그 곳에 연못을 만들게 함) 하고 그 많던 재산도 몰수하였다. 그리고 연좌형법에 의해 그 일족은 처형되었으며, 16세 미만의 세 자녀는 귀양을 보냈다.
또한 주문모 신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던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역시 서울의 양반가로 동정을 갈망했던 이순이(루갈다)을 혼배라는 외관(外觀) 속에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로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세계에 유래가 없는 동정부부가 탄생하였다.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고결한 마음의 결합은 얼마나 행복하였으며 하느님의 눈에 그 결합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을까?
그들 또한 유항검의 순교와 함께 장렬하게 순교함으로써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천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오롯이 봉헌하였다. 매장지는 전북 김제군 용지면 재남리 바우백이였으나, 전동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1914년 3월 사순절에 전동성당으로 안치했다가, 같은 해 4월 19일 치명자산으로 옮겨 모셨다.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
신유박해(1801년) 때에 유항검이 순교한 날(1801년 월 17일)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과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은 역전모의죄로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김유산과 이우집은 불고지죄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로써 이곳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7인이 순교한 성지가 되었다.


전동 성당의 순교자들
- 윤지충(바오로 33세)/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 권상연(야고보 41세)/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48세) 호남의 사도/전주 초남리 출신.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 (음력)
- 윤지헌(38세) 윤지충의 아우/고산 저구리 거주.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유관검(34세) 유항검의 아우/전주 초남리 출신. 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김유산(토마스 41세) 북경 왕래 밀사/전라도 진잠 거주. 불고지죄로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이우집(40세) 유관검과 친척/전라도 영광 사람. 불고지죄로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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