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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주 가톨릭 신학원이 위치해 있는 숲정이(윤호관)성지는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1144-1에 위치. 호남지방은 ‘호남의 사도’라 불리운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전교가 되어 전주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회의 요람지였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정이’혹은 ‘숲머리’라고도 하는 이곳 숲정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 가족이 처음으로 처형되면서부터 순교자들의 처형이 그치치 않았다.

즉 1801년 12월 28일 유항검의 처 신 희(申喜),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조카 유중성(柳重誠, 마태오)이 이곳에서 참수되면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다.

수 많은 순교자 중에서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839년에 참수된 신태보(申太補, 베드로, 71세), 이대권(베드로, 58세), 이일언(욥, 73세), 정태봉(바오로, 44세), 김태군 등 5명이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리에 살던 정문호(바르톨로메오, 65세), 손선지(베드로, 46세), 한재권(요셉, 30세 혹은 37세), 조화서(베드로, 52세), 이명서(베드로, 45세), 정원지(베드로, 20세) 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을 비롯한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致命)하였다.

현재 전주 숲정이 순교성지는 원래 위치로부터 남쪽으로 약 250m 정도 벗어산 위치에 자리잡고 잇다. 전주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잇다보니 여러 현세적인 이유와 도시개발에 밀려 난 탓이다. 참으로 애석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위에는 아파트와 상가가 즐비하고 ‘숲정이’라는 말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나무가 몇그루 없어 숲정이를 사진으로 찍어 표현하는데 무척 애를 먹을 정도였다.

숲정이 순교성지에는 훗날 천주교인들이 해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92년 학교가 전주시 삼천동으로 이사하고 난후 체육관을 ‘윤호관’으로 개조하였고, 1400평의 성지를 확보하였다.

윤호관은 18세의 나이로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한 조윤호(요셉)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을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 행사의 장소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 뜻이 깊다고 하겠다.


신태보(申太補, 베드로, 1768∼1839)
신태보는 박해를 피해 강원도 산중에 있을 때나 서울로 올라와서 교회 부흥사업에 전력할 때 늘 교리서를 복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다. (제 2부. 박해시대의 토막상식. 제 8편의 교우촌 참조)
그는 경북 상주(尙州)에서 1827년 전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는데 3도(道)에 사교(邪敎)인 천주교를 퍼뜨린 주모자로
지목돼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형벌을 받았다.
두팔을 등뒤로 돌려 묶고, 양 무릎과 발목을 동여맨 다음 무거운 막대기를 팔과 등사이에 가로 지르고, 두 개의 굵은 몽둥이를 열십자로 두정강이 사이에 끼워 놓고서 사람이 몽둥이의 끝을 타고 앉으니 신태보는 다리뼈가 으스러져 기절해 버렸다. 감옥으로 옮겨져서도 그는 앉을 수도 없고 손발을 쓸 수 없을뿐더러 먹을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신태보는 그 후 여러차례 문초를 받았으나 매에 못 이겨 실신을 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고, 상주, 무주, 고산, 익산 군수(郡守)등이 입회한 합동 취조에서는 “ 겉으로는 몸을 삼가고 예의를 지키는 듯 하나 속마음은 썩고 있는 작금의 공자, 맹자의 가르침보다는 참 종교인 우리 천주교를 통해 덕행을 쌓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여 입회한 관장들의 미움을 몹시 사게 되었다.
신태보는 그 덕에 13년이라는 긴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마침내 1839년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됨으로써 긴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토록 바라던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주님 곁으로 갔다.


조화서(베드로, 1814∼1866), 조윤호(요셉, 1848∼1866)부자
조화서는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한 조 안드레아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소탈하고 의리가 밝았고 남을 이해하는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그는 나이가 들자 몇해 동안 최양업 신부의 복사겸 마부로 일하면서 신심을 키워나갔다.
그후 그는 보다 적극적인 전교사업을 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전북 완주군 소양지방의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일을 하며 전교활동에 힘을 썼다.
1866년 12월 5일 조화서는 여느때처럼 아들 조윤호를 데리고 이웃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의 18살된 아들 조윤호(요셉)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곁으로 가기위해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서서 체포되었다.
아들마저 죽어 대가 끊기는 것과 나이 어린 며느리가 불쌍하여 조화서는 아들에게 “순교는 네 할아버지와 네 애비로 족하는, 너는 배교하고 돌아가라.”고 수차에 걸쳐 애걸하였지만 그는 “우리는 이미 각오했고 어떤 고난도 참고 주님의 계시를 따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 믿음이 헛되지 않게 함께 가도록 해 주십시오.”라며 거절하였다.
조화서는 전주 감영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관장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아들과 함께 죽는다면 대(代)가 끊어짐은 물론 전 재산을 빼앗기며 가족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배교하여 편안히 살아감이 어떻겠는냐?”고 배교를 강요하였는데 그가 말하길 “관장님! 오히려 내가 이세상을 등짐으로써 쉽게 주님곁에 갈 수 있을 것이요, 나는 거기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또 내가 살아 갈 수 있는 보배로운 재물이 거기 있을 것이니, 이세상 재물일랑 당신들 마음대로 하십시오.”하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마침내 1866년 12월13일 조화서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고, 정중히 성호를 긋고 머리를 내밀며 여유를 보이자 화가 난 회자수(망나니)가 사교(邪敎)에 미친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자 망나니에게 “당신도 천주교를 믿어보시오. 그러면 나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고 천국에 갈꺼요.”하며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 52세 때 였다.
한편 아들 조윤호는 전라 감사 앞에 불려나가 여러차례 혹독한 고문과 채찍질을 당했는데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감사(監司)는 아직 나이가 어린 조윤호에게 배교하고 가족과 함께 밝게 살라고 여러차례 권장하였으나,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당신들의 뜻에 달려 있음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이라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감사도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이 못된 녀석, 너를 죽일 수 밖에 없구나. 후회하지 않겠느냐?”하자, “예, 하루빨리 주님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그는 죽음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가 형장(刑場)으로 떠나는 날은 마침 장날이었는데, 감사는 어린 사형수가 불쌍하여 장터에서 행렬을 멈추고 그에게 음식을 사 주었다. 그가 정중히 성호를 그으며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맛있게 음식을 먹자 측은히 여긴 감사는 또 다시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어찌하여 맛있는 음식이 있는 이 세상을 버리고 죽기를 원하며 터무니없는 천국을 믿느냐. 배교하면 너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 보내주마.”하며 진정으로 그를 동정하였으나 조윤호는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할 뿐 완강히 배교를 거절하였다.
결국 서천교 장터에서 그는 곤장으로 때려 죽이는 장살형을 받았으나,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자 형리(刑吏)들은 장터 거지떼들로 하여금 밧줄로 조윤호의 목을 매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게 하여 죽였다.
그날이 1866년 12월 23일이니 그의 아버지 조화서가 참수된지 10일 후 였고, 그의 나이 18세 였다.
그가 순교한 전주 서천교 도로변에는 십자가 모양의 비석이 서 있어 오가는 이에게 그날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고,
전주 숲정이 순교성지에는 그를 기념한 ‘윤호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뜻을 후손들에게 되새겨 주고 있다.


한재권(韓在權, 요셉, 1829 혹은 1836∼1866)
한재권은 1829년(혹은 1836년) 충남 대덕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는데 열성적인 어머니 밑에서 착실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자라면서 성품이 착하고 신앙심이 두터워 교우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후 밀어닥치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전주지방의 대성마을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회장직을 맞고 있던 손선지(베드로)를 도와 열심히 전교활등을 하였는데 성실하고 착한 그의 성품 때문에 이것에서도 그는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전교를 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그는 여러날을 두고 땔감이나 장작을 만들어 이른 새벽에 이십리도 넘는 장에 나가 팔아 전교활동비를 만들었으며,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기도 하였다.
불쌍한 사람을 전교 길에 만나면 옷을 벗어주고는 자신은 추워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그의 부인은 그런 남편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거르는 일이 없었고, 집안에서도 늘 화목하고 기쁨이 가득한 가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훌륭한 아버지이며 남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또 그는 결코 남과 다투는 법이 없었고, 이웃이나 친인척간에 이해관계가 얽히는 일이 생기면 늘 자신이 먼저 양보하고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였다.
그런 그가 늘 준비하고 애착을 가졌던 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 즉 복음의 전파와 순교였다.
마침내 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대성마을까지 휘몰아쳐 성탄이 얼마남지 않은 1866년 12월 3일 그는 손선지(베드로)회장 등 6명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바로 이튿날 그는 전주 감영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천주교인임을 스스로 밝히고 순교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심한 고문과 형벌이 가해졌는데 그는 더욱 용덕을 발휘하여 끝까지 맞서 이겨내었다.
하지만 비신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친구인 박 별감을 통해 전라 감사 이근섭을 만나 그를 돈으로 매수하였다. 전라감사는 그대신 당신 아들이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를 해 주어야 일이 성사된다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한재권에게 “나는 너를 걱정한 나머지 감사에게 돈을 바쳤다. 너는 감사 앞에 나가거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면 네 목숨도 부지되고 돈을 쓴 네 아비의 노력도 허사가 된지 않을 것이니 꼭 이 아비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려무나.”하고 애절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는 이미 순교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저 말고도 여러 자식들이 있으니 아들하나 없는 셈 치시고 그 자녀들과 더불어 사십시오.”하고 아버지의 뜻을 일축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끝질기게 구명운동을 벌였고, 돈을 이미 받은 관에서는 배교를 강요하며 온갖 고문을 자행하여 한재권은 매에 못이겨 실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끝까지 순교만을 원하는 그에게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체포된 지 10일 후인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그의 서른 해(혹은 서른 일곱해)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천주교우들이 숲정이에서 수습하여 ‘용마루’고개에 매장하였는데 이듬해 봄에 그의 아버지와 형이 전주‘막고개’로 이장하였다.(정문호, 손선지의 순교사는 천호성지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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